▲ 떼려야 뗄 수 없는 키보드와 컴퓨터.jpg

 

키보드는 그저 컴퓨터의 일부다. 망가지기 전에는 따로 구입하거나 바꿀 일도 없다. 오래 써 때 묻은 지저분한 키캡을 물티슈로 닦으며, '이놈의 키보드는 망가지지도 않는다'며 무념무상으로 두드리기만 하던 아이템이다.

 

그랬던 키보드가 요즘은 키덜트족의 신선한 취미 아이템으로 진화했다. 이름하여 키캡놀이 때문. 키캡을 바꿈으로써 눈도 즐거워지고, 열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새로운 재미와 감각도 즐길 수 있게 된 셈이다. 키캡놀이가 무엇인지, 그리고 키캡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글에 5분만 투자해보자. 최소 키캡 중수 이상은 될 수 있을 것임을 보장한다.

 

 

'키캡놀이'가 뭔데?

 

▲이런 놀이?


키캡놀이는 내 키보드를 구성하는 각각의 키캡을 모양이나 색, 재료, 인쇄폰트, 인쇄방식이 다른 키캡으로 바꾸는 행동을 말한다. 여러 종류의 키캡을 조합해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적이고 신선한 키보드를 가지는 것이 목적이다. 주로 체리 사의 스위치와 체리식 유사 스위치를 적용한 기계식 키보드에 적용되는 놀이지만, 사실 광축키보드, 무접점 키보드, 일부 멤브레인 키보드도 키캡놀이를 즐길 수 있다. 

 

▲색상, 인쇄폰트, 인쇄방식, 재질 등이 다른 키캡을 조합해서 나만의 키보드를 만든다

 

런데, 그저 눈으로 보는 즐거움만 업그레이드된다고 하기에는 키캡을 바꿈으로써 얻는 소소한 손끝의 감각이 제법 재미있다. 키캡을 바꾸면 손끝에 닿는 키감, 귀에 들리는 키보드 타건음도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키캡놀이는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과 촉각까지 포함하는 일종의 감각 놀이라 할 수 있다. 

 

 

생각보다 넓고 깊은 키캡의 세계 : 재질, 형태, 인쇄방식 등

 

▶ 키캡의 재질

▲실제 나무로 만든 기계식 키보드 키캡

<출처: Massdrop.com>

 

키캡은 익숙한 플라스틱부터 메탈, 실리콘, 나무 등 독특한 소재까지도 재료로 사용한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재료는 플라스틱인 ABS와 PBT다. ABS의 장점은 다루기 쉬워 제조 단가가 낮고 색 표현력이 우수하다는 점이다. 보급형 키보드의 키캡은 대부분 ABS로 만든다. 단점은 내마모성이 약해서 좀 쓰다 보면 키가 번들번들하게 닳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저렴한 가격과 예쁜 색상을 무기로 키캡놀이 초보들이 접근하기 좋다. 간혹 해외에서 소량 주문 제작하는 키캡 중에는 ABS 키캡임에도 상당히 고가인 세트도 있다. 디자인과 색상이 유니크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플라스틱 종류별 마모도(가로, 낮을수록 좋음)와 마찰계수(세로) 그래프. ABS는 마찰계수가 높아서 잘 닳는다

<출처: 듀폰(Dupon)>

 

PBT는 고급 키캡 재질의 대명사로 통한다. 마모와 열에 강해 변형이 작기 때문에 오래 써도 번들거림이 덜하다. 하지만 소재의 특성상 가공 난이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다. 기술력이 높은 제조사의 제품이 아니면 키캡의 옆과 아랫부분의 마감이 좋지 않다는 점도 단점으로 꼽힌다.

 

그 외 체리 사 정품 키보드에 주로 사용하는 POM이라는 다소 생소한 플라스틱 재질도 있다. 내마모성과 비중이 PBT보다 우수하며 태생적으로 마찰계수가 매우 낮아 표면이 매끈한 편이다. 덕분에 모태 번들거림이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제조가 어렵고 수요도 많지 않아 소규모 키캡 제조사는 거의 만들지 않는다.

 

▶ 키캡의 제조방식

▲이중사출은 인쇄 각인의 내구성을 향상시키는데도 매우 효과적이다

<출처: 아이오매니아>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한가지 재질의 플라스틱으로 쉽고 단순하게 만드는 일반사출과 다른 두 색의 플라스틱을 사용해 각인까지 멋지게 강조하는 이중사출이 그것이다. 이중사출은 키캡 사출 시 각인도 함께 완성하는 덕에 지워질 염려도 없다. 언뜻 봐도 일반사출보다 화려하고 매력적이지만, 제작 난이도가 약간 높다. 그래서 예전에는 제조 난이도가 낮은 ABS가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PBT 키캡도 이중사출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 키캡의 문자 인쇄 방식

▲왼쪽부터 차례대로 레이저 각인, 실크 인쇄, 이중사출, 염료승화 인쇄 방식

 

키캡의 문자 인쇄 방식은 크게 네 가지다. 레이저 각인, 실크 인쇄, 이중사출, 염료승화 인쇄가 그것이다. 레이저 각인은 레이저 열을 이용해 글자 부분만 각인한다. 제작비가 덜 들고 각인도 잘 안 지워지는 편이라 널리 쓰인다. 만져보면 글자가 약간 오돌토돌하다. 실크 인쇄는 얼핏 보면 레이저 인쇄처럼 보이지만 빛에 잘 비춰보면 스티커를 붙인 것처럼 글자 주변에 흔적이 남아 있다. 내구성이 낮아 문자가 금방 지워지기 때문에 주로 저가형 멤브레인 제품에 사용한다. 

 

제조 방식 때도 언급했던 이중사출은 키캡의 배경이 되는 플라스틱에 글자 모양으로 구멍을 만들고, 그 부분을 다른 색의 플라스틱으로 메워서 글자를 만든다. 덕분에 글자 각인 부분이 손상되거나 지워지는 경우가 없다.

 

염료승화 인쇄는 키캡 인쇄 방식 중 비용이 가장 많이 들고 까다롭다. 단순한 프린트가 아니라 염료를 가열한 뒤 키캡 위에서 승화시켜 각인하는 방식이기 때문. 그래서 열에 약한 ABS는 염료에 녹아버리기 때문에 제조가 불가능하며, 주로 내열성이 강한 PBT 키캡에 작업한다. 이런 PBT 염료승화 키캡은 어지간한 보급형 기계식 키보드보다 더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 장점은 PBT 재질의 장점, 인쇄가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PBT 키캡의 감촉이 인쇄 과정에서 훼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 키캡의 인쇄 형태

▲왼쪽부터 정각 인쇄, 측각 인쇄, 무각 인쇄

 

인쇄 형태도 세 가지로 나뉜다. 키캡 상단에 글자가 인쇄된 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정각 인쇄. 키캡 상단에는 문자가 없고 키캡 남쪽 측면에 글자를 새기는 측각 인쇄, 각인이 없어 단순하고 깔끔한 디자인이 특징인 무각 인쇄가 있다. 일부 기능이 많은 키보드는 정각과 측각을 모두 사용해 측각으로 기능에 대한 설명을 새기기도 한다. 

 

▶ 키캡의 형태(높이)

▲상단에서부터 차례대로 DSA, DCS-Cherry, DCS-OEM, SA 프로파일

<출처: geekhack.org, 제작자명: jacobolus>


같은 키캡이라도 높이와 형태가 다르다. 키캡은 형태(주로 높이)에 따라 DSA, DCS Cherry, DCS OEM, SA 등으로도 구분한다. 키캡놀이꾼들은 형태라는 말 대신 '프로파일(프로필)'이라고도 부른다. 

 

DSA 프로파일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키캡 중 높이가 낮은 편에 속한다. DSA 프로파일은 키보드 열마다 높이와 기울기를 다르게 세팅하는 스텝스컬쳐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노트북 키보드의 키캡 느낌도 난다. 일반적으로 접하는 키보드에 기본 탑재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쓰고 싶으면 키캡만 별도로 구매해야 한다.

 

DCS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반적인 스탭스의 키보드 키캡이라고 보면 된다. DCS는 OEM 프로파일과 체리 프로파일로 나뉘는데, OEM이 체리보다 조금 더 높다. OEM 프로파일은 다른 말로는 마제 프로파일이라고도 부른다. 끝으로 SA 프로파일은 키캡 가운데 가장 높이가 높고, 키캡 상단이 움푹 파여있어서 마치 클래식한 타자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유의 타격감과 키감이 있어서 호불호가 아주 극명한 키캡이다.


키캡의 매력과 재미는 이처럼 다양한 요소가 모여 탄생한다. 똑같은 키캡처럼 보이지만, 재질과 만드는 방법, 인쇄 방법 등에 따라 손끝과 귀로 전해지는 다양한 매력이 도드라지는 것이다. 키캡놀이에 빠져드는 가장 큰 이유다.

 

 

키캡은 얼마나 하나?

 


키캡놀이에 드는 비용은 특별한 재미에 비하면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1~2만 원대 저렴한 것부터 10만 원이 넘는 것까지 다양해, 예산과 취항에 맞춰 골라 즐기면 된다.


104키 이상의 풀세트 기준 1~2만 원대 키캡은 주로 ABS 재질로 제작된 것들이 많다. 가격대가 저렴한 만큼 두께가 얇은 제품들이 많이 포진해있다. 이 가격대의 키캡들이 저렴하다고 해서 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키보드를 누르는 촉감이나 소리는 두께에 따라 달라지는데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에, 어떤 키캡이 나에게 맞는지는 직접 장착해봐야 알 수 있다.

 

2~4만 원대쯤 되면 마감과 소재의 퀄리티가 더 좋아진다. PBT 재질의 키캡도 포진되어 있으며 두께가 적당해 내구성도 좋다. 5만 원 이상부터는 퀄리티가 부쩍 올라간다. 소재는 2~4만 원대 키캡과 같은 PBT 재질이지만, 두께가 두툼하고 염료승화 각인 등으로 디자인과 내구성 모두 우수한 제품이 많다. 

 

세트 기준 10만 원이 넘어서면 단연 고퀄리티의 세계로 들어선다. 주로 해외에서 소규모 공동 제작하는 키캡으로 디자인이 우수할 뿐 아니라 '레어'한 맛까지 담고 있다. 이런 제품은 국내에서 정식 유통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몇몇 매니악한 사이트들을 잘 살펴야 한다.

 

 

키캡 하나 질렀다. 그런데 뭘 어떻게 하지?

 

▲구매한 키캡이 도착했다면 당장이라도 이렇게 놀고(?) 싶겠지만, 그 전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출처: 티스토리 블로그, http://limchrm.tistory.com>

 

▶ 키캡 리무버 종류와 사용법
마음에 흡족한 키캡이 당신 손에 들어왔다고? 우선 축하한다. 하지만 키캡 교체하는 것도 나름의 방법과 주의할 점이 있다. 우선 키캡을 좀 더 쉽게, 그리고 상처내지 않고 바꾸기 위해서는 키캡 리무버가 필요하다. 키캡 리무버는 키보드와 키캡 분리에 쓰는 기본 아이템이다. 

 

 

 

짧은 플라스틱 리무버는 문자열 같은 작은 크기의 키캡 제거에 편리하지만 간혹 키캡 옆에 긁힌 자국을 만들 수 있으므로 아주 귀한 키캡을 다룰 때라면 조심히 사용하자. 철사 2개를 ㄷ 형태로 굽힌 금속 리무버는 키캡 제거 속도는 다소 느리지만 옆면에 상처가 나지 않는다. 대신 빡빡하게 체결된 키캡을 제거하기 위해 힘을 많이 줄 경우에는 철사가 닿는 키캡 하부에 찍힌 자국이 남을 수 있다. 

 

리무버를 사용할 때는 키캡의 중앙부분에 리무버를 잘 걸친 후, 한 손으로는 키보드 본체를 잡고, 교체를 원하는 키캡을 수직으로 살며시 들어 올리면 쉽게 제거할 수 있다. 이때 수직이 아니라 대각선으로 들어 올리면 잘 빠지지 않고 키캡이나 스위치에 무리가 갈 수 있다. 주의할 것.

 

▶ 키캡 교체 전 사진 찍어두기
혹시 자신의 키보드가 배열이 평범한 배열이 아니라 독특한 배열의 키보드일 경우에는 키캡 교체 전에 미리 사진을 찍어두자. 키캡 교체 도중 배열이 헷갈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 키캡의 용이한 보관을 위해 키캡 페이퍼, 키캡 트레이, 키캡 보관용 통 등을 구해서 활용하는 것도 좋다. 봉투나 서랍에 담아 그냥 보관하다 보면 발생할 수 있는 분실이나 손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 키캡 페이퍼나 트레이는 키캡 위치까지 쉽게 알 수 있어 교체 작업이 용이하다.

 

▶ 다양한 키캡 세트를 조합해서 나만의 키캡을 만들어보기

<출처 : 티스토리 블로그, http://limchrm.tistory.com>


보다 특별한 나만의 키캡으로 더 큰 재미를 즐기기 위해 서로 다른 키캡 세트를 조합하는 것도 추천한다. 기능을 담당하는 모디 키캡과 문자열 키캡을 전혀 다른 종류의 키캡으로 조합해 새로운 세트를 창조하는 것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당신의 디자인 감각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키캡을 전부 다르게 조합할 수도 있으니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만의 키캡이 주는 재미가 얼마나 클지 궁금하다면, 시도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눈과 손과 마음을 모두 만족시키는 키캡놀이

 

지금은 디테일의 시대다. 개인의 취향이 존중받는 시대이자, 다양한 취미와 재미가 공존한다. 키캡놀이 또한 소소하면서 특별한 재미를 제공하는 취미다. 현대인들에게 생필품처럼 자주 등장하는 키보드. 매일 보는 물건이지만 흰색, 검정색 일색으로 아무런 감흥이 없던 이 물건에 생기를 불어넣어 보자. 다양한 디자인과 질감의 키캡을 바꿔 사용하면서, 나에게 맞는 키캡을 찾아보자. 처음에는 눈이 호강하고, 나중에는 손끝의 감각이 만족할 것이다. 키캡의 세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익사이팅하다.

 

 

기획, 편집 / 다나와 송기윤 (iamsong@danawa.com)
글, 사진 / 테크니컬라이터 이병진 (news@dana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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